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신체 건강에 미치는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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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및 뇌과학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신체 건강에 미치는 영향

by 리리의 책과 삶 2023. 1. 27.

소아과의사인 네이딘 버크 해리스는 저소득층 유색인들이 사는 동네에서 일하면서 심각한 트라우마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본다. 아동기의 불행감과 망가진 건강 사이에 생물학적으로 연관성이 있을지 모른다고 여긴 그는 호르몬과 세포 수준에서 이 가설을 과학적으로 밝혀낸다. 

 

건강 상태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10가지 성장 환경

연구 결과 18세가 되기 이전에 아래 제시된 항목을 많이 경험한 아이일수록 성인이 된 이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해당되는 항목이 많을수록 결과가 나빴다. 

1. 정서적 학대 (반복적)

2. 신체적 학대 (반복적)

3. 성적 학대 (접촉)

4. 신체적 방임

5. 정서적 방임

6. 가정 내 약물 남용 (알코올 중독자나 약물 남용 문제가 있는 사람과 거주)

7. 가정 내 정신 질환 (우울증이나 정신 질환을 앓은 사람 혹은 자살을 기도한 사람과 함께 거주)

8. 어머니가 폭력을 당함

9. 부모의 이혼 또는 별거

10. 가정 내 범죄행위 (가족 중 누군가가 감옥에 수감된 적이 있는 경우)

위의 연구에서 밝혀진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1.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은 놀라우리만치 흔하다.

미국 전체 인구 중 67% 이상이 최소 한 가지 이상의 항목에 해당했고 4가지 이상 해당되는 사람은 12.6%에 달했다.

2. 아동기 부정적 경험과 건강 상태 간에는 용량-반응 관계dose-response relationship가 있다.

즉, 해당하는 항목이 많을수록 건강에 대한 위험도도 높아진다. 4개 이상 경험한 사람은 하나도 경험하지 않는 사람에 비해 심장병과 암에 걸릴 확률이 2배 높았고 만성폐쇄성폐질환에 걸릴 확률도 3.5배 높았다. 7개 이상 해당하는 사람은 살면서 언젠가 한번 폐암에 걸릴 확률이 3배 커지며, 미국인 사망 원인 1위인 허혈성 심장질환을 겪을 가능성도 3.5배 높아진다. 6개 이상에 해당하는 사람은 전혀 해당되지 않는 사람에 비해 기대 수명이 20년이나 짧다.

 

어릴 때 겪는 과도한 스트레스가 문제의 원인이다.

보통 많은 연구자들은 비만과 건강 악화의 원인을 개인의 잘못된 행동으로 여긴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불우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나쁜 식습관과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에 건강이 나빠진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스트레스 반응 체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어릴 때 받은 반복적인 스트레스가 견딜만한 수준을 넘어가 버리면 뇌의 구조와 기능, 나아가 발달 중인 면역계와 호르몬계에도 영향을 미쳐서 DNA를 해독하는 능력까지도 달라진다. 스트레스 반응 체계가 조절 장애 패턴으로 형성되고 나면, 단순히 인간의 의지나 행동만을 탓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한도를 넘어서는 스트레스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치명적인 영향

MRI 기술 덕분에 지금은 트라우마를 겪은 아이들의 뇌 상태를 측정할 수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후군을 겪은 적이 있는 10세에서 16세 아이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문제 증상 수가 많은 아이일수록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높고 해마의 부피는 더 작았다. 추적 조사를 해보니, 더 이상 트라우마 상황을 겪지 않음에도 해마의 크기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과거에 겪은 스트레스가 신경 체계에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의미였다. 

앞선 10가지 항목을 대입해본 결과, 4개 이상 해당하는 아이는 과체중 또는 비만일 가능성이 2배였고 학습 및 행동 문제 진단을 받을 가능성은 32.6배에 달했다. 학교에서 '문제아'라거나 'ADHD 환자' 소리를 듣는 아이들이 실은 삶에서 스스로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얘기다. 

 

유독성 스트레스와 면역계의 관계

지속적이고 과도한 스트레스로 스트레스 반응 조절 체계에 문제가 생기면 면역과 염증 반응도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스트레스 호르몬이 면역계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요소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스트레스 호르몬에 만성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다. 코르티솔 수치가 높아진 사람들은 감기를 비롯한 각종 감염, 위장염 등 바이러스성 감염에 취약하고 결핵과 특정 종양을 물리치는 능력도 떨어진다. 또 자가면역질환을 비롯해 알레르기와 염증도 증가시킨다. 

특히 아동기 스트레스는 아동과 성인 모두의 자가면역질환과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다. 위의 10가지 ACE 척도에서 2개 이상 해당되는 사람은 0점인 사람에 비해 자가면역질환을 앓을 확률이 2배 이상이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면역계가 지나치게 반응하면 문제가 없는 곳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공격하게 된다. 그러면 체내 염증이 증가하고 염증 때문에 다시 면역계가 자극을 받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염증이 많아질수록 일부 염증이 체내 조직을 공격해 류마티스관절염, 염증성 장질환, 다발성경화증 같은 자가면역질환을 일으킬 가능성이 커진다.

균형 잡히고 튼튼한 면역계야말로 건강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아동기의 불행은 한 사람의 평생에 걸쳐 면역계의 발달과 조절에 해를 입힌다. 많은 질병이 신경과 호르몬만의 문제가 아니고 면역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면역계 때문에 생기는 증상들은 감지하기가 훨씬 어렵다. 

 

세포의 노화를 늦추는 비밀?

세포 내 염색체 끝부분에는 텔로미어라고 불리는 단백질이 붙어있다. 유전 정보를 담고 있지 않은 비암호 염기서열로, DNA 가닥 끝에 붙어서 염색체를 보호한다. 텔로미어는 환경에 매우 만감하다. 자동차 범퍼처럼 외부 충격을 먼저 흡수한다. 스트레스처럼 생화학적으로 해로운 인자는 DNA보다 텔로미어를 더 많이 손상시킨다. 텔로미어가 손상돼 길이가 짧아지면 세포가 노화하기 시작한다. 나이가 들수록 텔로미어 길이는 짧아지기 때문에 반대로 텔로미어의 길이를 측정하면 수명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텔로미어가 손상되면 세포가 노화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텔로미어의 손상과 단축으로 인해 세포가 암 세포로 변할 수도 있다. 

텔로미어를 손상시켜 세포의 조기 노화를 일으키는 요인은 굉장히 많지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만성 스트레스'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인기의 부정적 경험은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데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반면 어린 시절에 누적된 부정적 경험은 짦은 텔로미어 길이와 연관이 있었다. 특히 어린 시절에 겪은 부정적 경험의 수가 하나씩 증가함에 따라 짧은 텔로미어를 갖고 있을 가능성은 11퍼센트씩 높아졌다. 부모의 약물 또는 알코올 중독과 학대는 경제적 어려움보다 텔로미어 단축의 더 강력한 예측 인자였다. 

 


출처: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신체 건강에 미치는 영향

(네이딘 버크 해리스 /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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